물음표와 느낌표의 윤리교실
정의가 강자의 이익이 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할까? (트라시마코스의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 라는 주장에 반박해 보세요)
한판떼기 생활과 윤리
2022. 12. 28. 22:34
"정의는 강자들이 만드는가?"
"법은 강자들이 정의란 이름으로 만들어 놓은 자기 이익을 위한 수단인가?"
"만약 그렇다면, 법을 지키는 일은 정의로운가?”
잭 런던의 소설 <강철군화>에서
화자인 에이비스는 교회에서 만난 지인에게
“정의(right)는 법과 관계가 있지 않나요?”라고 묻는다.
그는 “첫 글자를 잘못 썼어요”라고 답한다.
“힘(might)이란 말인가요?”라고 에이비스는 다시 되물었다.
현실에서 힘과 정의는 잘 구별되지 않을 때가 많다.
트라시마코스의 주장
정의란 '강자의 이익'을 뜻합니다. 지배계급의 이익을 대변하는 것이 정의이고 이는 곧 강자의 이익을 말하죠.
... 불의는 정의보다 훨씬 강한 힘과 자유, 권력을 갖고 있기 때문입니다.
“정의는 강자에게 이익이요, 약자에게는 손해일 뿐이다.
‘모든 통치자는 자기 이익을 위해 법을 만든다. 그 법을 지키며 정의롭게 사는 약자는 결국 손해를 보게 된다.’
‘완전한 불의가 인간의 진짜 이익’이라고 주장
확실하게 부정의를 행하는 것이야말로 정의를 행하는 것보다 더 강하고 자유로운 것이다.
부정의를 저지르려면 더 크게 저지르는 것이 좋다.
트라시마코스에게 ‘진리’는 존재하지 않으며 정의는 강자의 이익을 표현하는 것으로 <힘이 곧 정의>라는 명제를 제시했다.
<정의로운 것은 어디서나 동일한 것으로서, 강자들의 이익이라는 결론은 매우 타당한 것이다>
통치자들은 절대로 약한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도록 법을 만들지 않습니다.
강한 자들이 법을 만드는 이유는 약하고 순진하고 올바른 사람들을 조종하며 자기 이익을 챙기기 위해서지요.
그래서 약한 사람들이 그 법을 지키면,
강한 사람들에게 이익이 되고 그들을 행복하게 만들어주는 반면, 자신들은 손해를 보며 행복에서 멀어집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세금을 낼 때, 정의로운 사람은 정직하게 세금을 다 내는 반면, 정의롭지 못한 사람은 속여서 내기 때문에 이익을 챙깁니다.
관직에 오를 때에도 정의로운 사람은 자기 집안일보다는 나랏일을 더 열심히 하기 때문에, 정작 자기 집안은 손해를 보게 됩니다.
공정하다보니 친척이나 친구들의 부탁도 거절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친한 사람들에게서 미움을 사게 되지요.
정의롭지 못한 사람들은 그 반대지요.
올바르지 못한 짓을 서슴지 않고 행하면서 큰 행복을 누리는 반면,
다른 사람이 올바르지 못한 짓을 저지르면 가차 없이 죄인으로 몰아붙이지요.
아시겠습니까?
내가 정의롭게 행동하면 나보다 더 강한 사람에게 이로운 것이 되고,
내가 정의롭지 못하게 행동하면 바로 나 자신에게 이익이 되는 겁니다.” (<국가> I, 338c, 343b~344c)
어느 국가, 어느 정치 체제에서나 법은 있기 마련.
그런데 그 법은 권력을 쥔 강자가 통치자로 군림하면서 세운 것이다.
이때 권력자들은 자기들에게 유리하게 법을 세울 것이다.
그러니까 보세요.
모든 나라에서 정권의 이익이 정의이고, 아주 명백하게 이 정권이 힘을 행사하기에 정의는 더 강한 자의 이익으로 귀결하는 겁니다...
말하자면, 정의란 실은 더 강한자 및 통치자의 이익이되 복종하며 섬겨야 하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자신에게 해로운 것이지요.”
일단 법 제정을 마친 다음에는 이 법, 다시 말해 정권 자기들에게 이익을 되는 것을
통치를 받는 사람들에게 정의로운 것인 듯 공표하고서는 이를 위반하는 자들을 정당하지 못한 일을 한 자들로 취급하고 처벌하는 것이죠.
약자의 행복과 이익은 강자의 관심 밖에 있다.
그러므로 법을 지키면 권력을 손에 쥔 사람들의 의도에 따르는 것이 되며, 따라서 그들에게 이익이 된다.
설령 그들이 많은 사람들을 의식해서 법을 공정하게 세웠다고 하더라도, 사정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강한 사람들은 법을 지키지 않고도, 마치 법 위에 군림이라도 하는 양, 법에 의한 처벌을 가뿐하게 피해나갈 수 있는 반면,
약한 사람들은 법을 어겼을 경우 가차 없이 엄격하게 벌을 받기 때문이다.
이런 주장에는 법을 어기면 이익이 되며, 법을 지키면 손해가 된다는 전제가 깔려 있다.
사람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할 때, 욕망을 충족시키며 행복을 느낀다.
하지만 모든 사람들이 각자 욕망을 채우려고 하다 보면, 갈등이 일어나기 십상이다.
더구나 한정된 양을 그보다 많은 사람들이 원할 때, 서로 먼저, 더 많이 차지하려고 거칠게 다투고 싸울 것이다.
이때 인간은, 홉스가 말한 것처럼, 인간에 대해 늑대가 된다(homo homini lupus).
곰곰이 따져본 사람들은 개인의 자유와 권리, 욕망을 조금씩 양보하여 권력자에게 맡기고,
그의 통제 아래 들어가 법과 원칙에 따라 사는 것이 전체적으로 더 낫다는 계산에 이르게 된다.
이와 같은 근대 사회계약론의 논리가 플라톤의 <국가>에서도 울린다.
불의를 저지를 때 얻게 될 이익과 불의를 당할 때 입게 될 손해를 비교해보니 손해가 더 크다는 계산이 나오자,
사람들은 서로에게 불의를 저지르지 말자고 합의하고 법을 세운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떤 경우든 모든 사람들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본성을 갖고 있으니
권력을 위탁받은 사람도 그럴 테고, 따라서 그가 법을 세울 때 자기에게 이익이 되게끔 조작할 것이다.
설령 그가 공정하게 법을 세운다 해도 그 법을 지키지 않으려고 하며, 안 지키고도 법에 의해 처벌이 되지 않게끔 손을 쓸 것이다.
본디 법이라는 것이 인간의 욕망을 일정 부분 제어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니만큼, 욕망을 채우려고 하다 보면 법과 부딪치게 되며,
따라서 법을 어기며 욕망을 채우되 법에 의해 처벌을 받지 않는다면 이익을 얻을 수 있다는 셈법이다.
여기에서 나오는 결론은 뻔하다.
가장 지혜로운 처신은,
겉으로 보기에는 정의롭게 보이면서, 실제로는 교묘히 법을 어기며 욕망을 채우며 이익을 챙기는 것.
단 불의를 저지를 때는 들키지 않도록 조심할 것.
혹시 들키면, 말로써 잘 둘러대고, 돈을 써서 회유하거나 힘을 써서 협박하여 처벌을 피할 것.
정의롭게 법을 지키며 건실하게 산다는 것,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칭찬을 받고 폼은 좀 나겠지만 실리가 없으니, 영리한 사람이 할 일은 아니다. 정의롭게 사는 건 별로 쓸모가 없다.
그런 삶이 좋다면, 왜 사람들이 틈만 나면 부정을 저지르며 불법을 일삼겠는가?
사람들이 정의롭게 행동하고 법을 지키는 까닭은,
잘못 행동하다 재수 없게 걸리기라도 하면 벌을 받거나 망신을 당하게 된다는 사실이 두려워서가 아닐까?
만약 절대로 들키지 않고 불의를 저지를 수 있으며, 부정을 저지르고도 언제나 영원히 처벌을 면할 수 있다면,
과연 사람들은 정직하게 행동하며 정의를 추구할까?
정의란 누구의 이익이라고 단정할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굳이 누구의 이익이라고 파악한다면 그것은 전체의 이익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일반적으로 정의로 대표되는 법은 상호간의 이해관계를 조절하여 서로에게 이익이 되거나 피해가 최소화되는 방식을 규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다"라는 말자체가 지극히 현실적인 현상을 반영하고 있다는 점
착하게 살면 손해를 본다.
성실하고 정직하게만 살다간 융통성이 없는 바보라는 딱지가 붙을 수도 있고, 뜻하지 않게 봉변을 당할 수도 있다.
적당히 얽히고설키며 너무 튀지 않게, 남들 하는 만큼 살짝 때 묻고 사는 게 무난하다.
털어서 먼지 안 날 정도가 되면 오히려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든다.
영리하게 챙길 것 잘 챙기는 게 삶의 지혜다.
검고 좀 더러워도 고양이야 쥐만 잘 잡으면 된다.
유전무죄, 무전유죄, 그리고 지강헌과 전재용
황제노역 사건
기업인 가석방
외교부 2부 제도
유명환 전 장관의 딸 특채 사건
검찰기소독점주의



2014년 대한민국, 대법원은 쌍용자동차 해고노동자들이 낸 해고무효 확인 소송에서 사측의 정리해고는 적법했다며 원심을 파기했다.
올해 2월, 대법원은 KTX 해고 여승무원을 한국철도공사 소속 직원으로 볼 수 없으며, 불법파견이 아니라는 판결을 내렸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지 1년째가 되고 있다. 세월호의 눈물은 현재 진행형이다.
국정원 선거개입
정의란 것이 결국은 강자의 이익을 위한 것 아닌가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질문은 역사 속에서 내내 계속되어 왔다.
플라톤은 지성을 갖춘 입법자가 만든 ‘최선의 법률’에 모든 사람이 복종할 때 이상적 법치가 이루어질 수 있다고 보았지만,
언제나 법을 만들고 해석하는 것은 강자의 몫이었기 때문이다.
법치를 통한 ‘지성의 배분’은 실현되지 못한 이상이었다.
지금 시대를 사는 많은 사람들 역시 소크라테스의 주장보다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에 더 호응할지 모른다.
트라시마코스의 현실 진단처럼 결국 소크라테스는 덕에 기초한 올바른 삶을 주장하다 참으로 어이없게 처형된다.
신성 모독과 청년들을 현혹한다는 게 소크라테스의 죄목이었다.
트라시마코스의 소크라테스에 대한 2500년 전의 비아냥이 현실적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이에 대해서 적지 않은 사람들은 분개하면서 강자의 정의는 가짜 정의이며, 정의롭지 못한 강자는 타파되어야 한다고 말할 것이다.
그런데 트라시마코스는 이에 덧붙여 좀 더 강력한 논리를 구사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강자가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강자가 못되기에,
‘도덕’이나 (강자와는 다른 방식의) ‘정의’를 내세워
강자를 비난 한다는 것이다.
트라시마코스의 논리를 정치적 현실에서 볼 때,
대부분의 국가들은 미국 같은 강국이 되고 싶어 한다고 할 수 있다.
다만 자신들이 당하는 입장이기에 미국을 비난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의 비난이 진정한 것이냐가 문제인 것이다.
또 다른 대화 참여자들은 ‘귀게스의 반지’를 예로 든다.
이 반지를 끼면 투명인간이 되어 제 마음껏 쾌락을 누릴 수 있다.
누구라도 반지가 자기 것이 되어 누릴 쾌락들을 상상해 봤을 것이다.
그런데 만일 귀게스의 반지가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는 상황이 되면 사람들은 그것을 파기하거나 금지하기를 원할 것이다.
자기가 그 반지를 가질 확률이 크지도 않고,
남이 그것을 가졌을 때 혹시라도 자기가 당할 피해를 생각하면
자기가 가졌을 때 누릴 쾌락보다 오히려 더 고통스러울 것이라고 판단할 것이기 때문이다.
각자가 자신의 ‘이름값’을 다하는 것이 정의라는 전제가 깔려 있고, 소크라테스는 거기에 설득의 중심을 둔다.
의사가 있다고 하자. 그가 그 이름에 맞게 ‘의사’라면, 그의 본분은 환자를 돌보는 것이다.
따라서 의사가 의사로서 최선을 다한다면, 이익을 보는 것은 환자이다.
만약 의사가 환자를 돌보는 데에는 관심이 없고, 돈을 버는 일에만 집착한다면, 그는 ‘의사’가 아니라 ‘돈벌이꾼’이다.
과잉 진료로 수가를 조작하고 불필요한 수술을 강요한다면, 그는 ‘의사’가 아니라 ‘의사’라는 이름을 내세운 ‘사기꾼’이며 ‘강도’다.
가난한 환자가 왔을 때, 손해를 걱정하며 치료를 고민하는 순간 ‘의사’라는 명분은 흔들린다.
배의 ‘선장’은 승객의 안전한 이동을 책임질 때에만 ‘선장’이다.
‘선장’의 이름값을 포기하고 승객을 버리고 달아나려는 순간 그는 무엇인가?
그들이 ‘의사’나‘ 선장’의 이름값을 위해 본분에 충실하면 이익을 보는 것은 자신들이 아니라 환자와 승객이다.
통치자는 ‘나라를 다스리는 기술’을 가진 정치의 강자다.
그가 자기 이름에 충실하면 이익을 보는 것은 통치자 자신이 아니라 그의 다스림을 받는 시민들이다.
만약 그가 자신의 이익을 위해 법을 제정하여 다스림이 필요한 약자들에게 손해를 입힌다면,
그는 ‘통치자’가 아니다.
‘통치자’의 탈을 쓴 ‘돈벌이꾼’이다.
만약 그가 약자를 폭력으로 강압하며 자신의 이익을 지키는 데 급급하다면, 그는 ‘통치자’라는 허울을 쓴 ‘강도’다.
진정한 ‘통치자’는 자신의 통치술을 이용해서 통치를 받는 시민들을 편안하고 행복하게 만든다.
그가 세운 법은 사익을 위한 것이 아니므로 시민들이 법을 지키며 정의로운 삶을 사는 것은 시민에게 이익이 될 것이다.
모든 사람들이 제 몫에 충실하고 그 이름값을 다할때, 그곳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를 것이다.
그것이 소크라테스가 그려주는 이상적인 국가, ‘아름다운 나라(kallipolis)’이다.
트라시마코스의 이런 논리에 대해 플라톤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답하지만,
그 중에서 결정적인 것은 다음과 같은 반론이다.
“말이 잘 달릴 수 있고, 눈이 잘 볼 수 있고, 단검이 잔가지를 잘 잘라낼 수 있다.
즉 모든 사물은 그것이 가장 잘 하는 기능을 가진다.
그리고 각자의 기능이 가장 잘 발현될 때 그 뛰어남을 갖추게 된다.
마찬가지로 정신적 뛰어남도 존재하며,
뛰어난 영혼은 우리를 (진정한 의미에서) 잘 살게 해 준다.
정의는 정신의 훌륭한 상태이지만, 부정의는 못된 상태이다.
그래서 정의로운 사람은 잘 살지만, 정의롭지 못한 사람은 잘 살지 못한다.
정의로운 자는 행복하나, 정의롭지 못한 자는 불행하다.”
가장 결정적인 문제는 사람들이 거짓 잘 사는 것과 진정으로 잘 사는 것을 진심으로 구분할 것인가이다.
다른 경우들에서도 마찬가지이지만 여기에서도 대중들의 평균적인 의식이 결정적이다.
강자가 휘두르는 폭력에 저런 행복은 진정한 행복이 아니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대처할 수 없다.
또 그런 강자는 결국 불행한 것일 뿐이라고 말하는 것도 적어도 현대 정치의 맥락에서는 너무 약한 논리이다.
플라톤의 논리는 윤리의 맥락에서는 일정한 대안이 될 수 있지만, 정치의 맥락에서는 쉽게 현실화될 수 없다.
국가는 통치자, 수호자(군인), 생산자라는 세 계급으로 되어 있다고 말한다.
인간 영혼도 이와 마찬가지여서 이성, 기계, 욕망으로 되어 있으며 각각은 국가의 세 부분에 해당한다.
그런데 국가나 개인이나 제대로 되려면 이 세부분이 서로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하지만 통치자들이 훨씬 수가 많은 생산자들 앞에서 주눅 들거나 수호자가 나머지 두 계급을 위협하는 경우에 사회는 혼란에 휩싸일 터이다.
개인도 마찬가지여서 우리의 욕망을 이성이 통제할 수 없는 경우에는 삶은 걷잡을 수 없어 진다.
따라서 국가의 경우에는 통치자가, 개인은 이성이 나머지 부분을 잘 지도할 수 있어야 한다.
잘 지배되는 국가는
통치자, 수호자, 통치자가 제 역할을 다하여 각각 지혜, 용기, 절제라는 덕(德:aretē)을 이룬다.
그리고 이 경우 국가를 ‘정의롭다’고 말한다.
개인의 경우에는 이성, 기계, 욕망이 제대로 기능할 때 지혜, 용기, 절제가 실현되며 이렇게 된 사람을 ‘정의로운 자’라고 한다.
지혜, 용기, 절제, 정의. 플라톤의 사주덕(四主德)은 바로 이것을 말한다.
결국 ‘강자의 이익이 정의이다.’라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에 대해 플라톤은 이렇게 반론하는 듯하다.
설사 힘센 자가 이득을 얻었다 해도
이성의 지배가 무너져 욕구에 휩싸인 영혼은 행복할 수 없다.
반대로 억압 속에 힘들게 살아도 냉철한 이성으로 욕구를 잘 다스리는 사람은 행복하다.
결국 영혼의 조화를 이룬 정의로운 개인과 국가는 어떤 환경 속에서도 행복할 수밖에 없다는 논리다.
그들은 "정의롭게 보이는 것만이 아니라 정의로운 것 자체가 이익인 이유"를 밝혀 달라고 소크라테스에게 요구한다.
이에 대해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말을 통하여 인간의 영혼 3분설로 설명하였다.
인간의 영혼은 이성, 기개, 욕망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정의롭지 못한 사람의 영혼은 이 세부분들이 조화를 이루지 못 하고 대립되어 결국 불행해 지지만,
정의로운사람은 영혼의 세부분들 간에 조화가 이루어져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결국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라고 주장함과 동시에 때로는 정의롭지 않게 사는 것이 유익하다는 현실논리가 성립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정의롭지 않게 사는 것은 자기 영혼을 구성하는 이성, 기개, 욕망이 조화를 이룰 수 없게 만들어 궁극적으로는 불행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식으로 논쟁이 진행되어 플라톤은 인간이 정의롭게 삶을 살았는지 여부는
인간이 생을 마친 뒤 저승에 가서 심판관 앞에 서서 심판을 받음으로서 결정된다고 주장한다.
이 주장은 물론 영혼 윤회설이 전제된 것이지만 인간은 그 사후 심판의 결과,
정의롭게 산 사람은 즐거움의 1000년 행로가 보장되지만
정의롭지 못하게 산 사람에게는 1000년간의 고통과 징벌의 행로가 강제된다는 것이다.
플라톤은 결국 영혼 윤회설을 신빙성있게 증명하지는 못하였으나,
정의는 강한자만의 이익이 될 수있는 것이 아니라,
정의로운 삶 자체가 모든 인간이 추구해야 가치있는 삶이라는 그의 주장을 사후보상을 받는다는 이야기로 보강하였다.
‘철학적 마음’에서 인간의 선과 정의가 나온다
플라톤은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통해 상대방이 정의로운 행위의 선이 어디에 있는지를 검토하도록 함으로써
‘철학적 마음’을 획득하도록 안내한다.
이를 통해 ‘정의 그 자체’로서의 선을 불완전하게나마 인식하도록 도와준다.
'철학적 마음’은 궁극적인 지혜를 추구하는 마음이다.
이는 현실에서 겪으면서 얻어지는 ‘경험적 마음’과는 차원이 다르다.
‘정의란 강자의 이익’이란 인식은 현실 속에서 보는 부정의(不正義)한 현상들을 그대로 받아들인 불완전한 측면이 많으므로
‘철학적 마음’으로 인식하는 ‘정의’의 관념과는 거리가 멀 수밖에 없다.
저자는 플라톤이 경험과 인식의 부조화와 모순을 극복할 수 있는 삶의 원리로서의 정의가
오로지 교육을 통하여 철학적 마음을 획득함으로써 실현될 수 있음을 밝혀준다고 강조한다.
『플라톤의 국가론 강의』는 리차드 레위스 네틀쉽(Richard Lewis Nettleship)이 1885년 및 1887~88년에 제자들을 상대로 플라톤의 『국가』를 강의한 해석서이다.
특히 플라톤의 『국가』의 내용 중 교육 철학적 관점에서 심층적으로 해석함으로써 교육학의 고전으로 자리매김하게 된 또 다른 고전
'다수의 강자인 통치자는 자기의 이익을 위해서가 아닌 피지배자의 이익을 도모하는데 있고,
통치자는 자기보다 열등한 사람에게 지배를 받는 형벌을 피하기 위해 지배자의 자리에 앉는다는 것이다'는 말로 정의(定義)에 대한 정의(正義)를 내린다.
"우리는 여러가지 욕구를 가지고 있고 많은 사람들이 욕구를 충족시키려고 한다.
하나의 목적을 위해서 어떤 사람의 도움이 있어야 하고 다른 것을 위해서 또한 다른 사람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이들 협력하는 자 및 도와주는 자들이 한군데 모여있는 공동생활체를 국가라고 한다"
즉 개인적 이익을 위해서 모인 국가라는 단체라고 할지라도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기 위해서 자신의 일을 열심히 한다면 국가의 정의는 이뤄진다고 설명한다.
또한 공동 소유, 공동 분배를 함으로써 진정한 서로의 이익을 이루는 정의를 이룰 수 있다고 보고 있다.
정의는 약자를 위한 선을 실현하는 것이며,
국가는 행복이라는 선을 실현하기 위해 모인 집단의 형태이며,
지도자는 이를 효과적으로 실현하는데 지혜로 용기있게 행동하는 자라고 할 수 있다.
이같은 정의로 생각한다면 국가와 그 지도자는 정의의 사도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이성(理性)의 힘을 강조하고 있다.
나는 그것을 이성의 힘이라고 생각하네. 본능에 저항하는 어떤 것으로서 말이네.
그래서 이 두 가지(욕구와 욕구에 대한 자제심)를 구분해
하나를 합리적 이성이라 부르고 본능에 집착하는 마음을 불합리한 욕구라 부를 수 있을 것 같네.
결국 우리의 정신 속에는 이와 같은 두 가지 원리가 작용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겠네.
그렇다면 분노할 경우 보이게 되는 기백같은 기상은 어떻게 봐야 하나. (중략)
어떤 욕구가 이성에 저항하도록 강요하면,
당사자는 자신을 질책하는 동시에 강요하는 내부의 억압에 분개하지.
마치 서로 싸우는 두 당파 사이에 있는 것처럼. 그래서 결국엔 기백이 이성의 편에 서게 된다네.
- 「국가론」 플라톤. 이환 역
소크라테스는 누구에게든 욕구가 있다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각자의 욕구가 있다고 해서 그 욕구를 채우는 것에 급급하면 누군가의 것을 빼앗는 격이 될 수 있으니
자기 욕구를 이성의 힘으로써 조절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국가의 통치자는 자신의 이익보다는 국가 전체의 이익, "특정 계층만이 아니라 전국민이 행복하도록" 이끌어가야 하며,
국민 개인은 각자의 역할에 충실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소크라테스는 통치자에게는 철저한 근검과 감성교육의 필요성을 얘기하고 있다.
"그들은 꼭 필요한 물건들만 갖도록 해야 한다.
집이든 창고든 사유재산을 갖도록 해서는 안되고,
식량이나 보수도 필요한 만큼만 지급하되 연간 소비량 이상을 주어서도 안된다"는 것이다.
또한 타인의 처지에 차변을 두어 이익을 고루 분배하도록 하는 법을 만들 수 있으려면
무엇보다도 통치자의 감수성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소크라테스는 이들을 위한 시가, 음악, 체육 등의 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더 큰 이익은 자기를 둘러싸고 있는 이웃들에게도 그리고 더 넓게는 인간을 둘러싸고 있는 생태계에도 우리의 이성이 미칠 때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
강자의 이익 역시 사회적 신뢰의 바탕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임
강자와 약자가 서로 신뢰할 수 있는 사회를 만드는 것이 강자의 이익을 비롯한 모두의 이익을 구현하는 일임
개인의 이익은 개인이 홀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할 때보다 같은 이해를 가진 집단을 통해 추구될 때 더욱 증폭된다. 그런데, 이 집단 내부에도 강자와 약자는 존재하게 마련이다. 집단 내의 강자가 자신만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집단 내 약자의 이익을 짓밟는다면 어떨까. 이 집단이 가진 효율성은 떨어질 것이고 결과적으로 조직 구성원 모두의 이익이 저하될 것이다. 강자의 이익 추구 행위가 스스로의 이익을 망치는 것이다.
반면, 조직 내 구성원 간의 신뢰와 의리가 돈독할 때 조직 내의 효율성은 상승하고 그들이 목표로 한 이익은 더욱 쉽게 달성된다. 고로, 강자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행동보다는 타인과의 신뢰와 의리를 지키는 방법이 더 많은 이익을 담보한다. 이것은 비단 강자들의 조직 내에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다. 한 사회, 한 국가 내에서도 강자나 특정 세력의 이익 추구보다 타인과의 신뢰와 의리를 통한 공익 추구가 더 많은 이익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다.
정의 문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회의 절대 다수가 가지는 정의감이다.
정의감의 수준이 높은 사회에서 “어떻게 저럴 수가 있는가”가 정의감이 낮은 사회에서는 “뭐, 그럴 수도 있지”가 된다.
이 두 판단을 가르는 경계선이 어떤 수위에 있는가가 그 사회의 정의감이다.
사람이란 혼자 생각만으로 행위를 할 수는 없기에,
높은 정의감이 지배하는 사회에서 함부로 행위를 하기는 힘들며
또 정의감이 낮은 사회에서는 그만큼 쉽게 행위를 할 수 있다.
이상적인 생각으로 보면, 이런 논리는 남의 ‘눈치’를 전제하기 때문에 크게 자율적인 정의관은 아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한 것은 한 사회 전체를 지배하는 분위기, 정의감이다.
진정한 정의는 소수자들의 저항을 통해서 성립한다.
강자의 이익에 대한 소수자들의 저항과 그 저항을 뒷받침하는 대중의 정의감이 결합해야만 정의로운 사회를 기약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의로울 수 있는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정의는 시선(視線)에서 나온다
사르트르의 <존재와 무>
열쇠 구멍을 통해 안을 훔쳐보는 사람의 일화
‘누군가 나를 본 것’
그 사람의 시선에 제압돼 버린다.
바로 시선은 권력의 행사다
- 제레미 벤담의 원형감옥 <파놉티콘>
푸코는 ‘감시와 처벌’에서 근대 사회의 특징을, 한 보이지 않는 권력자가 대중을 감시하는 체제로 설명한다.
그 권력자가 빅 브라더가 되었든, 게이트 키퍼가 되었든지 간에
파놉티콘이라는 원형감옥에 나타난 감시의 원리가 사회 전반으로 스며들면서 규율 사회의 기본원리로 탈바꿈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파놉티콘은 디지털 세상이 도래하면서 보이지 않은 일방적 감시가 아닌 상호감시가 가능한 시놉티콘(Synopticon)으로 발전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프로이센 군주제와 타협한 후년의 헤겔은 <법철학> 제3장에서 이런 말을 했다.
“위대한 일을 이루려면 여론을 경멸할 줄 알아야 한다.”
통치자는 여론 저 위에 머물러야 한다는 얘기다.
트루스(Truth, 2015) - 영화는 저널리즘의 추락을 아쉬워한다. '질문'하지 않는 저널리즘의 모습을 보여주면서
통치를 위한 최적자는 정부가 될 수 있지만 국가자체는 될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스럽게 논의해야할 문제는 최적자를 찾는 문제가 아니라 영원존속이 가능한 최적제도를 찾는 문제이다.
우리는 역사적으로 최적제도로 민주주의를 찾았다.
최적이라는 의미는 물론 이상적이라는 의미이지만 최고의 선을 찾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최악을 막았다는 의미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민주주의는 최악의 정치인을 막을 수 있는 제도이다.
어떠한 정치인이 되더라도 민주주의적인 방식과 민주주의적인 기관 의결 제도를 통해서 독자적인 결정을 할 수 없다.
예를 들어 행정부의 수장인 대통령이 최악의 사람이라도 사법부, 입법부가 그 최악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치명적인 단점으로는 최선의 대통령이 되더라도 그의 선을 사법부 입법부가 막을 수 있다는 것이다.
앞으로 역사적으로도 최선의 제도가 나타날 수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참여를 통해 알아볼 일이다.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목적은
가장 훌륭한 사람을 권력자로 선출하여 많은 선을 행하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사악하거나 거짓말을 잘하거나 권력을 남용하거나
지극히 무능하거나 또는 그 모든 결점을 지닌 최악의 인물이 권력을 장악하더라도
나쁜 짓을 많이 저지르지 못하도록 하는 것이 민주주의 정치제도의 목적이며 강점이다.
이 말은 많은걸 생각게 한다.
우리가 흔히 민주주의 하면 생각하는 기존의 상식에 회의를 불러오는 구절이다.
선거는 최선을 뽑는 것이 아니다. 차악을 뽑는 것이다.
그러기에 선거로 선출된 권력자가 나의 생각대로 정부를 운영하기를 바랄 수 없다.
하지만 우리가 선출한 권력자가 제대로 된 통치능력이 없으면 그를 바꿔야 한다.
평화적이고 합법적으로 국민이 정부를 교체할 가능성이 열려 있는 한, 그 나라의 정부는 민주정부이다.
잭 런던은 <강철군화>에서 “이기적인 자본주의의 부패로부터 인류형제애 시대”에 대한 염원을 담았다.
소설 속 시점인 27세기가 어떤 세상일지 상상조차 할 수 없지만
‘인류형제애 시대’에 대한 낙관은 솔직히 어렵다.
생명이 존재하는 사회는 끊임없이 이해의 대립 속에 놓여 있기 마련이다.
문제는 이해 대립이 아니라 어느 한쪽의 힘이 너무나 압도적인 상황이다.
‘강철군화’ 밑에서 현재 우리는 대부분 ‘일시적 생존자’다.
어딘가에 의리가 있다면,
그것은 누군가 거대한 적을 상대로 싸우고 있을 때 그 싸움을 모른 척하지 않기,
홀로 버거운 싸움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기, 곧 연대라고 믿는다.
이상적 인간 / 진정한 의미에서 잘사는 삶
민주주의 - 통치자, 지배, 행정부, 입법부, 사법부, 언론, 기업
깨어있는 시민의 - 철학적 마음 - 정의감 - 교육
조직된 힘 - 시놉티콘 / 참여 / 연대(모른 척하지 않기)

법은 국회에서 만들고 그 법을 해석하는 것은 법원의 몫입니다. 그런데 그 법은 우리 시민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낼 때에만 국민의 편에 서게 됩니다. 가만히 있는 것, 포기하는 것, 잊어버리는 것은 비겁한 행동입니다. 주권자인 국민이 적극적으로 참가해서 목소리를 낼 때, 그때에야 비로소 우리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고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갖게 됩니다. 그때에야 비로소 법은 우리 사회가 지향하는 정의를 실현하게 될 겁니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다
올바른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최대한 나에게 이익이 되도록 힘을 길러라!
겉으로 보기에는 정의롭게 보이면서, 실제로는 교묘히 법을 어기며 욕망을 채우며 이익을 챙기는 것.
단 불의를 저지를 때는 들키지 않도록 조심할 것. 혹시 들키면, 말로써 잘 둘러대고, 돈을 써서 회유하거나 힘을 써서 협박하여 처벌을 피할 것.
어떤 인간이 올바르게 사는 인간인가?
올바르게 살면 이익을 볼 수 있는가?
만약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잘 살고,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잘 살지 못하는 사회에서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왜 올바르게 살아야 하는가?
올바른 것이란 무엇인가? 올바른 것이 있기는 한가?
참고자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