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음표와 느낌표의 윤리교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인가? -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논쟁

한판떼기 생활과 윤리 2022. 12. 28. 19:42
플라톤의 『국가』는  ‘잘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 또는 ‘훌륭하게 산다는 것은 무엇인가’를 주제로 삼고 있다.
(정의에 대한 논의)
 
트라시마코스는 '정의'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것은 그저 강자의 이익에 봉사하는 행위일 뿐이라고 주장한다.
정의는 단지 강자가 설정한 이기적 규칙들에 순종하는 것의 문제이다. 
개인적 행위의 차원에서 보면, 불의가 정의보다 훨씬 더 이익이다.
즉 자신의 정당한 몫보다 더 많은 것을 챙기는 사람들이 정의로운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다.
 
글아우콘은 더 나아가서 정의롭게 행동하는 사람들은 오직 일종의 자기보존으로서 그렇게 할 뿐이라고 제안한다.
기게스의 반지(투명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반지)를 손에 넣은 사람은 누구든 정의롭게 행위할 동기를 상실할 것이다.


A : 정의로운 사람이지만 그 밖의 사람들에 의해 불의한 자로 여겨지는 사람
     A는 고초를 겪고 형을 받을 것이다. A의 삶은 행운과는 무관한 듯 보인다.

B : 교활하고 사악한 어떤 사람,
     즉 빠져나갈 수 있다 싶을 때마다 온갖 나쁜 짓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정의로운 체하는 사람
     B는 행복한 삶을 살 것이며, 존경의 모범으로 여겨질 것이다. 
     비록 그 가면의 속은 철저히 악할지라도
이것이 보여 주는 바는, 정의란 보상을 주지 못한다. 아니면 적어도 언제나 보상을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와 같은 주장에 대해 
소크라테스는 정의가 보상을 줄 뿐만 아니라 그 자체로 가치있는 것임을 보여줄 길을 찾는다. 
정의는 두가지 점에서, 즉 그 결과에 있어서 그리고 그 자체로 좋다는 것 말이다.
 
소피스트와 소크라테스의 정의란 무엇인가에 대한 논쟁을 정리하면 아래와 같다.
 

 
케팔로스 VS 소크라테스

 

케팔로스 소크라테스
올바름 속에서 살면 노년에도 희망이 있다.

재산 덕에 남을 속이거나 거짓말하지 않고
남에게 갚을 것을 갚을 수 있다

그래서 첫째, 올바름은 정직한 것이며 남에게 받은 것을 갚는 것이다. 
 
 
‘무기의 비유’

받은 것을 되돌려 주는 것이 상대방에게 올바르지 않은 상황

미쳐 버린 친구에게 빌렸던 무기를 돌려주는 것은 올바른 일인가?
 
폴레마르코스 VS 소크라테스

 

콜레마르코스 소크라테스
“각자에게 갚을 것을 갚는 것이다”

친구끼리는 서로에 대해 무언가 좋은 일을 하되

나쁜 일을 하지 않아야 한다
 
  누구에게 무엇을 어떻게 갚아야 올바르다고 말할 수 있는가?

친구에게 나쁜 것을 돌려주는 것도 올바른 일인가?

친구라고 모두 좋은 사람인가?

적에게 해로움을 주는 것이 올바른 일인가?
‘친구들에게는 이롭게 해주나 적들에게는 해롭게 해주는 것’

좋은 사람을 이롭게 해주고 나쁜 사람을 해롭게 하는 것이


올바름이 아니라면 무엇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상대가 친구이든 적이든 간에
남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올바른 사람이 할 짓이 아니다. 

왜냐하면 어떠한 경우에라도
누군가에게 해를 입히는 것은 옳지 않기 때문이다.
올바른 사람이 덕을 가지고 남을 해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

친구든 적이든 남에게 해를 주는 사람은 정의롭지 못한 사람
 
트라시마코스 VS 소크라테스 

 

  트라시마코스(Thrasymachos)
  소크라테스(Socrates)
올바름이란 더 강한 자의 이익 이외에 다른 것이 아니라고 주장

국가에서 ‘올바름이 무엇인가’라는 문제는
법을 통해 구체적으로 제시된다. 

그러나 법을 제정하는 사람들은 바로 힘 또는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에게 이익인 것을 올바름(정의)이라고 한다. 
참주제는 한 명의 참주의 이익을 위해,
귀족제는 소수의 귀족들의 이익을 위해,
민주제는 다수의 이익을 위해 법률을 제정한다.

법은 곧 정의이다.

‘모든 통치자는 자기 이익을 위해 법을 만든다.
그 법을 지키며 정의롭게 사는 약자는 결국 손해를 보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트라시마코스의 주장 가운데
올바름이 이익이라는 것에는 동의하지만

누구의 이익인지는 명확하지 않다고 말하며 
‘더 강한 자’에 대해 설명해주기를 요구한다.
강자는 단지 힘이 세거나 권력을 가진 자만을 가리키지 않으며
남보다 뛰어난 지식이나 기술을 가진 사람도 포함
실수하지 않는 통치자 또는 전문가나 기술자
(자신의 실수로 자신에게 불이익이 되는 법을 제정하면 안되니까)
 
 
그렇다면 강자에게 이익을 주는 기술이란 무엇인가?

기술이란 본성적으로 기술을 행하는 사람보다
기술이 행해지는 사람에게 이익이 된다. 

가령 의술은 본래는 의사보다는 환자에게 이익이다.
 

전문적 기술은 반드시
강자라 할 수 있는 통치자나 전문가의 이익이 되지 않는다.

의사는 환자의 병을 치료하고, 선장은 승객의 안전을 돌본다.

마찬가지로 통치자는 통치받는 시민들을 이롭게 하는 사람 아닌가.
‘양치기의 비유’

양치기들이 양들을 돌보는 목적은
양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실은 자신들을 위한 것

양치기가 양을 치는 이유는
양이 가장 좋은 상태로 되게 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맛있는 양고기를 먹기 위해서 또는 팔기 위해서 
 
 
의술은 건강을 제공하고 건축술은 집을 제공한다.
그렇지만 모든 기술은 각 대상을 이롭게 한다. 

물론 기술을 통해 기술자는 이익을 얻을 수 있다.
그렇지만 기술은 유상으로 이루어지든 또는 무상으로 이루어지든
그 대상에게 이익을 줄 수밖에 없다. 

즉 기술은 기술을 가진 사람(강자)에게 항상 이득이 되는 것은 아니다.
 
“올바르지 못한 사람이 올바른 사람보다 더 나은 삶을 산다”

흔히 사람들은 올바르지 않게 사는 것이 나쁘다고 말하지,
올바르게 살지 않으면 불이익을 당한다고 말하지 않는다. 
현실적으로 때로는 올바르지 않는 것이 유익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1) 기술자 또는 전문적인 지식인은 지혜로우며 훌륭하다고 한다.
2)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은 자기와 반대되는 사람을 능가하려 한다.
3) 올바른 사람도 자기와 반대되는 사람을 능가하려 한다.
따라서 4) 올바른 사람은 바로 훌륭하고 지혜로운 사람이다.
 
오히려 올바르지 않은 사람이 나쁘고 무지한 사람이다.
 
 
궁극적으로 올바르지 않게 사는 것은 오히려 불이익이 된다
 
우리는 당장 부정한 짓을 저질러 눈앞에 이익을 얻을 수도 있다. 
그렇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다. 
부정한 짓을 저지른다고 모두 이익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더욱이 
내 육신에 이익이 될 수는 있지만 내 영혼에는 불이익이 될 수 있다.
 
“정의는 강자의 이익이 아닌 약자의 그것이다.
즉 진실의 지배자는 자신의 이익이 아닌, 피지배자의 이익을 추구한다.
그리고 
바른 사람은 선하고 지혜가 있지만, 부정한 자는 지혜가 없고 약하며,
따라서 정의는 지혜이자 덕이므로
부정보다 강력하여 행복을 가져다 주는 것이다.”
 
제 이익에만 마음 쏟는 이는 강도일 뿐, 통치자가 아니라고.
 
만약 그가 환자를 위하는 마음보다
자기 이익을 챙기는 데 혈안이 되어 교묘하게 거짓말을 한다면,
그가 의사인가? 의사의 탈을 쓴 강도가 아닌가?
 
통치자나 정치가도 마찬가지다.
만약 그들이
통치를 받는 사람들의 행복과 정의를 위해 법을 세우고 집행하기보다는
자신들의 이익을 챙기는 데에 더 마음을 둔다면,
그들은 진정 통치자도, 정치가도 아니다.
그런 가죽을 쓴 가장 위험한 강도다.
 
정의는 훌륭한 사람의 미덕이다.
정의로운 사람은
그 영혼이 참된 앎과 진정한 용기, 절제로 조화를 이루며,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정의로운 국가를 꾸리며 모두의 행복에 힘쓴다.
 
소크라테스
: 진정한 의미의 통치자는 자신의 이익만을 앞세우지 않소. 국민들의 이익을 염두에 두고 지시하는 것이 통치자요.
... 이로써 정의가 불의보다 더 강함이 증명되었소. ... 정의로운 자는 부정한 자보다 모든 면에서 뛰어나다는 거요.
지혜든 덕이든, 어떤 일을 도모하는 것이든 행동을 통일하는 데 있어서든,
그러므로 불의한 자들이 더 힘 있게 행동을 관철한다는 주장은 진실성 없는 얘기요. 
 

 

글라우콘 VS 소크라테스

 

글라우콘 소크라테스
트라시마코스가 주장한 ‘올바름은 강자의 이익이다’
글라우콘은 여기서 이익인 것이 좋은 것 
좋은 것? 

첫째, 그 자체로 좋은 것이 있다. 
둘째, 그 자체뿐만 아니라 결과 때문에도 좋은 것이 있다.  
셋째, 그 자체 때문이 아니라 결과 때문에 좋은 것이 있다. 
 
그렇다면 올바름은 어떤 종류의 좋은 것인가?
글라우콘은 세 번째 종류의 좋은 것 소크라테스는 두 번째 종류의 좋은 것
사람들이 올바르게 사려고 하는 것은
그 자체가 좋기 때문이라기보다는 사람들의 이목이나 평판 때문

만약 우리가 다른 사람들의 평판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우리가 만약 그렇게 된다면
누구나 올바름이나 올바르지 못함에 상관하지 않고
제멋대로 하려고 하지 않을까? 

‘귀게스의 반지’
( 투명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반지를 손에 넣은 사람은 
   누구든 정의롭게 행위할 동기를 상실할 것이다. )

대부분의 사람들이 올바르지 못한 행동을 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처벌 때문일 수 있다. 

사람들은 올바름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거나
좋아서 행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들에게 돌아올 평판 때문에 마지못해서 행하는 것이다. 
 
 
아데이만토스 VS 소크라테스 
 
아데이만토스 소크라테스
그들은 올바름 자체를 찬양하기 때문이 아니라
그 결과 때문에 찬양하는 것일 뿐이다.

올바르게 살면서 힘들고 어렵게 살겠는가, 

아니면 올바르지 않게 살면서
편안하고 쉽게 살겠는가를 선택하라면 어찌 하겠는가?
 
아데이만토스는 두 가지 방식의 삶 중에
올바르지 않게 살면서 편안하게 살기를 선택한 경우를 예로 든다.
 
우선 올바르지 않게 살면서
항상 남의 눈을 피하기는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이러한 삶이 더 피곤할 수 있다.
 

그러나 큰 일치고 쉬운 것이 어디 있겠는가?
이 정도는 충분히 감수할 수 있을 것
이다.
 
다음으로 다행히 남의 눈을 피할 수 있을지라도 
신들의 눈을 피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그러나 신들이 실제로 존재하지 않다거나,
또는 신들이 인간들의 일에 전혀 관심을 갖지 않을 수도 있다. 

만일 신들이 존재한다고 하더라도
기도나 제물을 바쳐 신들의 처벌을 피할 수 있다.
 
그렇다면 굳이 힘들고 어렵게 올바르게 살 필요가 있겠는가?